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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실망한 책 <그리스인 조르바> - 113/1000 본문
새해에 읽기에는 너무나 괴롭고 실망스러운 책이었으며, 한 장 한 장 읽기 버거울 정도여서—롤리타 이후로 이렇게나 읽기 싫은 책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롤리타는 작가가 아동성도착자를 혐오스럽게 쓰려고 일부러 독자가 혐오감을 느끼도록 쓴 것임을 감안할 때, 조르바가 훨씬 괴로웠다—읽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00년대에 쓴 책도 이보다 여혐이 심하지는 않을 것인데 어째서 1946년에 쓴 소설이 이렇게 여혐 범벅이어야 하는가. 그리스인 작가라서 그런 것 같다는 개인적인 편견이다. 개인적으로 느낀 그리스 문화가 아직도 그랬으므로... 여하튼 너무나 실망스러운 책이어서, 앞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사람까지도 마음속으로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인터넷 서점의 리뷰란을 보니 여혐이 심하다는 리뷰 밑에는 반드시 50-60대 남성으로 보이는 애독자가 여혐을 보느라 위대한 조르바의 영혼을 보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니 어쩌니 하는 댓글이 반드시 달려 있었다. 욕을 한들 카잔차키스 욕이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사람을 욕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들이 부들부들 '실드'를 치는지 모를 일이다.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자신이 작가가 아닌 이상 기분 나쁠 일이 무어 있담. 카잔차키스 본인이면 인정.
이 책은 객관적으로도 여혐이 심한 책이 맞으며 해외의 책 리뷰에도 그 점은 계속하여 지적되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여혐적 표현'이나 온갖 '여자 관련 표현'이 없이는 서술을 못하는 작가로 느껴졌다. 뭘 하나 묘사할 때도 무조건 젖가슴이 어쩌니 처녀가 어쩌니, 여자를 묘사할 때는 온통 가슴이나 섹스 얘기밖에 없고, 소설 속 여자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 묘사되기보다는 남자들의 욕정 상대이자 제대로 된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남자를 꼬시고 홀리고 잠을 자주는 수동적 역할밖에 부여받지 못하며, 인간 대 인간의 정서적인 유대와 사랑, 존중, 공감, 자유로의 갈망, 실패 후의 깨달음은 남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자는 인간 취급을 안 했다던 것의 연장선인, 전형적인 '그리스식 여혐'으로 느껴졌다.
여혐 빼고는 너무 좋은 책인데 그런 사소한 부분이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책에서 여혐적인 부분이 사소하게 다루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나에게 그런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만약 어마어마하게 잘 쓴 문학책이더라도 작가가 끝내주는 인종차별 주의자여서 문장마다, 페이지마다 '그 남자는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아시아 남성인 줄 알았다'거나 '구정물이 누런 색을 띠는 꼴이 꼭 한국인 피부 같았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넣어두었다고 생각해보라, 그 소설을 계속하여 명작이라고 읽고 회자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는 그의 문장들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여자 비하가 들어간 문장들을 전부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조르바의 명언 몇 줄, 책의 화자가 느낀 명언이 몇 줄... 나머지 내용은 사실 별 가치가 없었다.
조르바의 영혼이 자유롭고, 그가 독특한 캐릭터라는 것은 알겠다. 그 자유가 왜 온갖 곳에서 성매매와 계집질을 하고 다니는 것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남자 기준의 '자유'라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랑 자느라 돈을 홀랑홀랑 날려도 소설 속 화자인 '나'가 한마디도 안 하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는 게 남자들의 우정이라면 뭐 알겠다만 (그게 남자 기준의 '진정한 우정'이라면 정말로,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조르바의 궤변 중에는 마음에 와닿는 말들도 있었고, 자유로우며 괴팍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며 제멋대로이지만 나름의 선의와 의리가 있고, 순수한 면도 있으며, 자신만의 (개똥) 철학 또한 있는 인물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 점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르바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은 마치 tv 프로 '자연인'에나 나오는 아저씨들 같기도 했다. 그 괴팍함도... 그래서 중년 남성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나보다 ㅋㅋㅋ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 굉장한 강풍이 불었어요. 그놈은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짚어엎으려고 합디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에 이걸 꽁꽁 묶어 두고 필요한 곳을 보강해 둔 참이거든요. 나는 불 옆에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지요. 이봐,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우리 오두막에는 못 들어와. 내 불을 끌 수도 없고,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지.
믿음이 있나요? 그렇다면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거룩한 물건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나뭇조각이 되고 마는 거죠.
사실 조르바보다 훨씬 별로인 인물은 소설 속 화자라고 느꼈다. 조르바는 자신이 말하는 것, 묘사되는 것 그대로의 캐릭터이기라도 하지. 화자는 '과부 소멜리나'에게 욕정을 느끼면서도 숫기가 없어 계속하여 남 탓을 하다가(여자가 악마처럼 자기를 꼬였다나 뭐라나...) 과부와 시간을 보내고도 이후 과부의 죽음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고 어버버버 지켜보며 과부의 죽음을 초래한다. 적어도 조르바는 나서서 과부를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했건만, 화자는 소멜리나의 죽음을 딱히 슬퍼하지도 않고 구해주지도 않는 찌질한(...)모습이다. 남자의 관심을 거부하여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교회 마당에서 목이 잘리는 여자라니 1500년대 중세도 아니고 1900년에... 그리스의 여성 인권을 매우 잘 알겠는 대목이다. 아무리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1920~1930년 한국도 이렇지는 않았다.
부불리나에게는 또 어떤가. 없는 말을 지어내 조르바가 당신과 결혼하려 한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부풀려 불쌍한 부불리나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킬킬대기만 하며, 나중에 아픈 부불리나에게도 끝까지 거짓말을 나불대며 찌질한(...)면모만 계속하여 보인다. 자기 여자 친구도 아니고 생판 남한테 그런 쓸데없고 목적 없는 거짓말은 왜 한단 말인지... 주인공의 재미만을 위해 한 여자의 감정을 좌지우지하지만 그녀는 그저 늙은 창녀이므로 괜찮다?
세상에 조르바 같은 사람과 화자 같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조르바보다는 화자를 조심해야 한다. 조르바는 본인이 드러내는 성격 그대로의 사람이지만, 화자같은 찌질이는 배운 사람인척, 매너 있는 사람인 척, 음전한 사람인척 하면서도 반드시 음침한 면모를 내보이며 조르바 같은 친구에 맞춰 자기도 남자 서열 높아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책은 억지로 억지로, 끝냈다.
여혐이 안 묻어있는 카잔차키스의 문장들은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여혐이 안 묻어있는 문장을 찾기 위해 책을 샅샅이 뒤져야만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서 앗 이녀석 그래도 글은 괜찮게 쓰는데? 라고 생각할만한 타이밍이 되면 귀신같이 젊은 계집애의 젖가슴처럼~ 어쩌고 운운하는 노란장판 st 비유가 쏟아져나와 카잔차키스의 문장에 조금이라도 몰입하려는 나를 후두려패곤 했다. ㅋㅋㅋㅋ
새해부터 읽느라고 정말 괴로웠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굿바이 조르바. 굿바이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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